흥선대원군은 러시아 견제로 프랑스를 끌어들이려 했으나 천주교 금지 여론이 고조로 병인박해 발생하였고 이를 구실로 프랑스가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강화도 조약(조일 수호 조규)체결 : 조선이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근대적 조약으로 일본에 유리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조선을 자주국으로 명시(조선과 청의 전통적 관계 부인, 청의 간섭 배제), 부산 등 3개 항구 개항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침략 거점 확보), 연안 측량권 허용(조선의 영토 주권 침해, 일본의 군사적 침략 의도), 영사재판 건(치외법권) 인정(조선의 사법권 침해, 일본인의 자유로운 활동 보장) 등을 내용으로 한다.
국내에서는 흥선대원군이 하야하면서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민 씨 세력의 정권 주도로 대외 정책 변화했다
근대화를 시작으로 농민 세력이 정치화가 되었고, 고립 분산적이었던 기왕의 변혁 세력을 새로이 결집하고 반봉건·반제운동을 줄기차게 벌이면서 척사세력·수구세력 그리고 개화 세력까지 타도의 범주에 넣었다.
어쨌든 이들 모든 세력은 일제 식민지 통치 아래에서 세력권의 개편을 거치면서 그 운동 방향을 돌려야 했는데, 식민지통치를 겪고 있던 여러 세력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뉘어져야 했다.
하나는 일제 식민지통치에 동조하거나 협력하는 것, 다른 하나는 국권 회복을 위한 민족해방운동 노선으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민족해방운동 노선을 추구하는 세력들도 그 운동 방향을 놓고 이른바 민족개량주의 노선과 사회주의적 민족운동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이런 가운데 8·15를 맞이했다.
소련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점령국들은 분단 고착의 정책으로 밀고 나간 끝에 한 민족, 두 개의 국가가 남북에서 성립했다.
이런 속에서 또다시 극렬한 분열 양상을 보였는데, 각기 그 노선을 놓고 찬탁·반탁 또는 사회주의 체제·자본주의 체제를 지향했다.
여기에서 민족 통일운동도 전개되고, 좌우합작의 모색과 남북 현상을 추진하기도 했다.
북쪽에서는 주체사상이 결합한 사회주의의 인민공화국이 성립되어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토지분배를 단행했고, 남쪽에서는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자본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지주·친일 세력이 지배 세력에 포함되었다.
경제적으로는 농지개혁이 미숙하게 이루어졌고 그로 인해 일단 지주 경제를 지양하게 되었다. 또 원조경제도 예속 경제의 양상을 띠었으나 전후 복구에 한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다. 정치적으로는 독재정권을 유지하면서 반공 이데올로기가 국시(國是)로까지 등장하여 민주 세력의 탄압 무기로 쓰였다. 또 국제관계에서는 남북의 긴장을 이용하여 언제나 미국과의 일방적 관계로만 유지되었다.
5·16으로 이루어진 군사독재정권은 더욱 이런 파행적 방향을 설정하여 자유당 독재정권이 이룩한 여러 반민주적 형태를 심화시켰다.
1961년 5월 16일에 육군 소장 박정희를 중심으로 모인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일부 군인들이 제2공화국의 장면 정부를 물리력으로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군사 정변이다.
이로써 박정희는 1963년 대선을 치르고 민간 정부로 전환되기 전까지 군사정부의 형태로 한국 사회를 통치했다. 1960년 시민들이 4·19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지 1년 남짓 뒤에 발발한 군사 쿠데타는 한국 사회에 절차적 민주주의가 자리 잡는 과정을 결정적으로 지연시켰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제2군 부사령관인 소장 박정희와 8기생 주도 세력은 장교 250여 명 및 사병 3,500여 명과 함께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 기관을 점령하였다.
해병 제1여단장 김윤근 준장의 지휘로 해병대가 출동하게 된 것을 기점으로, 해병대와 공수부대가 한강 대교에 도달하였으며,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지시로 출동한 군사경찰 제7중대 병력과 약간의 총격전 끝에 서울 시내로 진입하였다.
이들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육군본부를 접수한 뒤, 주력은 서울시청에 진주하고, 해병대는 치안국과 서울시 경찰국을, 공수단은 중앙방송국을 이날 오전 4시 30분경 각각 접수하였다. 방송국을 접수한 쿠데타 세력은 라디오 방송으로 6개 항의 ‘혁명 공약’을 발표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 6개 항이란 ①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 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 ②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할 것, ③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청렴한 기풍을 진작시킬 것, ④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 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 ⑤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할 것, ⑥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복귀한다는 것이었다.
혁명 공약 첫머리에서 ‘반공을 국시(國是)로’ 한다는 점을 가장 먼저 내세웠던 것은 일반 국민은 물론 미국 측의 사상 검증을 염두에 둔 표현이었다.
대대 단위까지 군사고문단을 파견하고 있던 미국은 한국군 내부 쿠데타 발생 가능성을 인지하고 본국에 보고까지 했던 상황이었으나, 발발 직후 쿠데타 세력과 공식적으로 선을 그었다.
당일 오전 10시 18분 매그루더(Carter Bowie Magruder) 유엔군 사령관과 그린(Marshall Green) 주한 미 대사대리는 즉각 민주당 정부에 대해 지지를 표명하고 군 내부 질서유지를 요망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특히 한국군에 대한 작전 지휘권은 유엔군 사령관에게 귀속되어 있었으므로, 매그루더는 본인의 권한을 침범당했다고 불쾌해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오전 11시 30분경 윤보선 대통령을 면담하는 자리에서도 여전히 쿠데타를 진압하자는 강경책을 제시했으며, 19일 쿠데타 주도 세력을 만난 자리에서도 이 점을 문제로 삼았다.
쿠데타 직후 수녀원에 은신했던 장면 총리는 매그루더와 그린이 합법정부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한 직후, 미 대사관과 접촉하여 유엔군 사령관이 상황을 정리해 주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매그루더는 미군을 직접 동원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일단 한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부터는, 내정에 개입하더라도 최대한 간접적인 방식을 취했던 것이 미국 정부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그래서 유엔군 사령관은 이 경우에도 한국 정부 총리나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한국군을 동원하려고 했다. 총리가 부재한 상태에서 군 통수권을 행사해야 할 대통령을 방문한 매그루더와 그린은, 윤보선으로부터 쿠데타 진압에 대한 반대 의사를 전해 들었다. 장면과 민주당 신·구파 갈등을 겪고 있던 윤보선은 쿠데타에 대해 정적이던 장면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로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쿠데타 이틀 뒤인 18일에는 1군 사령관 이한림이 체포되었고,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군사혁명’을 지지하는 가두행진을 벌였으며, 결정적으로 장면 총리가 내각 총사퇴를 발표하고 정권을 군사혁명위원회에 이양했다. 19일에는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이 쿠데타 지도부와 접촉했으며, 군사혁명위원회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되었다. 쿠바 피그스만 공격 때문에 정치적인 부담을 지고 있던 미국 정부는 일관되게 불개입 태도를 유지했으나, 사실상 현상 유지 입장에 가까웠다. 유엔군 보좌관이었던 하우스만(James Harry Hausman), 신임 주한미국대사 버거(Samuel David Berger) 등 현지에 파견되어 있던 관계자들이 지지를 해주면서 미국 정부는 20일에 쿠데타를 추인했고. 같은 날 최고회의는 혁명내각을 발표하고 중앙정보부를 구성했다. 이후 7월에는 미국 국무부가 공식적으로 군사정부 지지 성명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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