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선사시대는 구석기 시대 후부터 시작되며, 약 70만 년 전에서 청동기 시대까지가 해당한다. 학계에서는 한반도에서 발굴된 유물 및 유적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발굴 성과와 연계하여 연구하고 있다. 즉 이때는 글로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굴된 유물이나 유적을 통해 당시 시대 상황을 연구하는 것이다.
구석기 시대
약 70만 년 전부터 한반도에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덕천군의 승리한 동굴 최하층 유적, 충청북도 단양군 금굴, 평안남도 상원 검은모루 동굴 등에는 기원전 109만년 경의 뗀석기와 동물 뼛조각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한국의 구석기 시대는 한반도의 선사시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구석기 시대는 대략 70만 년 전부터 약 1만 년 전까지 지속되었으며, 한반도의 초기 인류 생활의 흔적을 보여줍니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도구를 사용해 생존하며 사회와 문화를 형성하는 기초적인 생활 방식을 발전시켰습니다.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은 사냥과 채집으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돌을 깎아 만든 간단한 도구들을 사용했으며, 이 도구들은 주로 사냥, 고기 해체, 나무 가공 등에 활용되었습니다. 이런 도구들 덕분에 초기 인류는 다양한 환경에서 적응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도구는 점차 발전하여 더욱 정교하고 다양한 형태로 진화했으며, 그 과정에서 인간의 지능과 창의성이 함께 발달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여러 곳에서 구석기 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대표적인 유적지로는 충청남도 공주의 석장리와 경기도 연천의 전곡읍 전곡리 등이 있습니다.
석장리는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적지 중 하나로, 1964년에 발굴이 시작되었습니다. 석장리 유적에서 출토된 다양한 석기와 동물 화석은 당시 사람들이 돌도 구를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경기도 연천에 위치한 전곡리 유적은 구석기 중기 문화와 관련된 유물들이 발견된 곳입니다. 특히 이곳에서는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인류가 비교적 정교한 도구를 사용했음을 시사합니다. 아슐리안형 도구는 주로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발견되는 유형으로, 한반도 구석기 문화가 넓은 범위의 문화와 연관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구석기 시대의 도구는 크게 초기에 사용된 자갈돌 같은 비교적 간단한 도구부터 점점 다양한 용도로 제작된 석기로 발전하였습니다. 이러한 도구는 사냥, 가죽 벗기기, 음식 가공 등에 사용되었으며, 인간의 생존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주먹도끼, 찌르개, 긁개 등이 대표적이며, 시대가 흐를수록 더욱 정교하고 다양한 형태의 도구가 만들어졌습니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자연환경에 따라 이동하며 살았습니다. 한반도의 구석기 인류는 강가나 동굴, 바위 그늘 등에서 생활했으며, 계절에 따라 이동 생활을 하며 식량을 구했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완전히 자연에 의존했기 때문에 기후 변화와 환경 조건이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시 한반도는 현재보다 더 춥고 때문에 동굴에서 생활하거나 불을 사용해 체온을 유지하는 등 생존을 위한 다양한 지혜를 발휘했습니다.
한국의 구석기 시대는 단순히 도구 사용만이 아니라 인류의 문화적, 정신적 진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합니다.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 다양한 사회적 상호작용을 하며 지식을 공유하고 후대에 전수하였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발전이 인류의 진보에 중요한 기초를 마련한 것입니다.
신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는 구석기 시대와 달리 돌을 갈아 만든 간석기가 쓰인 시대이다.
한국의 신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는 간석기를 비롯하여 빗살무늬토기와 덧무늬토기가 있다. 덧무늬토기는 한반도 남부의 일부 지방에서 발견되며, 빗살무늬토기는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되었다. 이 때문에 한국의 신석기 문화를 빗살무늬토기 문화라고도 한다. 간석기는 신석기 초기부터 쓰였으나 농기구나 무기에 간석기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중기 이후이다.
청동기 시대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약 2000~300년의 시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농경의 발달로 잉여 생산물이 생기고 청동기가 사용되면서 사유 재산 제도와 계급이 발생하였다. 그 결과, 부와 권력을 가진 족장(군장)이 출현하였고, 성읍국가로 발전되었다고 추측된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고인돌, 비파형 동검, 미송리식 토기 등이 있다. 부족장은 세력을 키워 주변 지역을 아우르고, 마침내 국가를 이룩하였다. 국가가 이륙이 됨으로써 인구가 상승하고 약속이 필요해지자 법이 생겨난 것이다.
고조선 성립 이후 원삼국시대
고조선은 청동기 시대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국가이다. 단군은 고조선을 다스리던 군장의 칭호로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많은 단군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나 그 이름이나 재위 연도를 알 수는 없다. 일각에서는 환단고기를 근거로 단군의 이름과 재위 기간을 거론하는 경우도 있으나, 환단고기는 많은 면에서 신뢰성을 갖추지 못한 자료로 비판되고 있으며 역사학자들은 환단고기를 사료로 인정하지 않는다.
고조선은 단군조선 시기와 위만조선 시기로 나뉜다.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수용하면서 중국 한나라와 대립할 정도로 발전하였으며, 만주와 한반도 각지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등 여러 나라가 성립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다.
위만조선
위만조선은 연나라 사람 위만이 고조선에 망명하여 준왕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여 건국된 나라이다. 위만조선은 활발한 정복 사업으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고, 중앙 정치 조직을 갖추고 있었으며 한나라와의 중개무역을 독점하여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부여
부여는 별도의 건국 신화를 가지고 있는데, 북부 여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다섯마리의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내려와 흘승골성에 도읍하였다는 건국 신화가 있고 동부여는 북부여와 해부루의 아들 금와왕이 세웠다고 한다.
부여는 전국을 사출도(四出道)라 칭하는 지역으로 나누어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와 같은 제가(諸加)가 일부 지역을 맡아 다스렸다.
고구려
고구려의 건국 신화는 이후 주몽이라 불리는 군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고구려는 땅이 협소하고 산악지역이 많아 주변에 대한 전쟁을 자주 하였다. 주변의 여러 소국을 복속시키며 확장하던 고구려는 부여를 흡수하여 동아시아의 강자가 되었다.
삼한
기원전 8세기 무렵 이미 한반도 여러 곳에 비파형 동검을 사용하는 지배 세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기원전 4세기에는 세형동검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 수많은 성읍 국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수많은 고인돌을 남겼는데 크고 작은 소국들은 점차 연맹왕국을 이루어 마한, 변한, 진한의 삼한이 되었다. 삼한 중에 가장 먼저 세력이 커진 것은 마한이었다. 진한의 여러 부족 중에는 박혁거세를 중심으로 한 사로국(斯盧國)이 경주평야의 6촌의 씨족 세력을 기반으로 신라로 발전해 갔다. 변한에서는 구야국(狗邪國)이 가야로 발전하였다.
'역사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사-조선시대 (1) (0) | 2025.02.12 |
---|---|
한국사-고려 (0) | 2025.02.12 |
한국사(삼국시대) (0) | 2025.02.12 |
한국사의 개념 및 정의 (0) | 2025.02.12 |
역사학의 개념과 정의 (0) | 2025.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