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

한국사-고려

토리여사 일상 2025. 2. 12. 13:37


한국사-고려 

전통 시대의 정치를 역사적으로 살피려면 시대구분에 있어 왕조를 중요한 단위로 삼을 수 있다. ‘한국 중세사’는 한국 시대사의 한 부분으로 흔히 고려(高麗)의 후삼국통일부터 조선이 건국한 1392년까지를 가리킨다.

고려(高麗)는 918년 왕건이 건국한 이후, 1392년 이성계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한반도에 존재했던 나라이다.

통일신라 하대에 송악(현재의 개성 특별시) 지방의 호족인 왕건이 918년에 고려를 건국하였으며, 그 뒤, 935년 신라, 936년 후백제를 차례대로 복속하였다.

광종은 황권의 안정과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 등을 시행하고 공신과 호족 세력을 제거하였다. 경종 때는 전시과 제도를 실시하였고, 성종은 지배 체제를 정비하였다(시무 28조). 수도 개경의 외항인 벽란도에서 송, 일본 등지의 상인들과 무역하였다.

12세기에 들어 고려의 지배층 내부에서는 문벌 귀족과 측근 세력 간에 정치권력을 둘러싼 대립이 치열해지기 위해 시작해 무신정변이 일어났고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로 이어지는 최 씨 무신정권이 집권 되었다. 또한 이 시기를 전후로 전국 도처에서 수많은 반란이 일어나고 무신들의 폭정으로 인해 고려의 국력은 전성기에 비해 크게 쇠퇴하게 된다.

국력이 매우 쇠약해진 상황에서 몽골제국의 침략에 고려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하고 30년 동안 항쟁했으나, 전 국토가 초토화되고 결국 부마국으로 전락하면서] 국운이 기울게 되고, 공민왕의 개혁 실패와 내우외환에 이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기점으로 고려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고려시대는 중세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를 말하자면 첫째, 고대사회의 편성 원리인 골품제도(骨品制度)의 극복이다. 신라는 출생한 혈족에 따라 지위와 신분이 규정된 골품제가 기본적인 사회체제를 이루고 있었지만 고려는 고대적이며 폐쇄적인 골품체제에서 더욱 개방되고 진전된 사회라는 점에서 중세라 할 수 있다.

둘째, 지방 호족이 있다. 신라는 서울의 중앙귀족 중심의 정치체제를 이루었으나 지방 호족은 마침내 고려를 건국하고, 지배층이 되었으므로, 중세 사회로 보는 것 이유이다.

셋째, 신라의 진골 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유교 정치이념을 채용하고, 당 · 송의 제도를 본받아 중앙집권적인 정치 제도를 실시한 점이다.

넷째, 불교에 있어서도 귀족적인 교종에서 벗어나 민중적이며 혁신적인 선종의 유행을 보게 된 것도 새로운 중세사상의 출현이라 할 수 있다.

다섯째, 사회적 · 경제적인 면에서도 태조의 조세개혁과 그 뒤의 전시과(田柴科) 시행은 확실히 진일보한 형태로, 중세적인 토지 지배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고려의 성립은 고대사회에서 중세 사회로 이행하는 한국 역사의 내재적 발전을 의미한다. 또한 외세의 도움 없이 한민족이 단결하여 세운 최초의 진정한 통일 국가였다.

(1)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의 통일
신라 말에 송악(개성)의 토호였던 왕건은 태봉(泰封)의 왕인 궁예의 부하였으나 918년에 궁예를 추방하고 즉위하여 국호를 고구려의 후계로 자처하는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라고 하였다. 

(2) 고려 초의 호족과 왕권
고려왕조는 불교를 장려하였으며, 건국된 지 약 50년이 지난 4대 광종 때에 이르러서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가 마련되어 국가 기반이 확립되었다. 

(3) 통치 기구와 지방제도
통치 기구는 왕권이 확립된 고려 초 성종에서 문종에 이르는 기간에 중국의 당 · 송의 제도를 수입하여 관제를 정비 완성하였다. 중앙에는 중에서, 문하, 상서의 3성(省)과 상서성의 지휘를 받는 6부를 두었는데 이는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4) 문벌귀족과 관료
성종 이후 중앙집권적인 국가 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중앙에 새로운 지배층이 형성되어 갔다. 이들은 신라 말기 지방 호족 출신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고위 관리들을 배출하였고, 문벌귀족이라 불렸다. 

문벌귀족은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관직에 따라 과전(科田)을 받는 외에 자손에게 세습이 허용되는 공음전을 받아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였다.

(5) 사회구조와 신분제
고려는 신분사회로서 가문에 따른 신분이 사회계층을 구분하는 기본조건이 되었다. 귀족이나 양인 · 천민 등 사회계층의 구분도 신분 차이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이는 정치적 · 경제적 · 사회적인 지위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었다.

사회계층은 지배층인 귀족 · 하급 관리와 피지배층인 양인 · 천민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네 개의 계층은 세습되는 신분제로 인해 그사이의 구별이 엄격하였다. 신분제도는 네 계층이지만, 그 가운데 귀족이 제일 신분으로 국가의 정치적 권력을 독점했기 때문에, 고려를 귀족사회로 일컫는 것이다.

(6) 무신정권의 성립과 사회 운영
문신 중심의 귀족사회였던 고려는 후기에 이르러 무인들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1170년에 일어난 무신의난에 의해 붕괴하여 무신정권이 탄생하였다. 무신의난의 발생 원인은 문벌귀족과 신진 관료 사이의 대립으로 인한 귀족사회 내부의 모순에 있었다.

무신 정중부 · 이의방(李義方) · 이고(李高) 등이 정변을 일으켜, 문신들을 죽이고 의종을 폐한 뒤 왕의 동생인 명종을 옹립하였다. 이들 무신은 스스로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정권을 잡아 무인 정치를 실시하였다. 무신정권은 1270년 임연(林衍) 부자가 몰락할 때까지 1백년간 계속되었다.

무신정권의 출현으로 귀족사회는 붕괴하고 정치적 · 경제적 · 사회적으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고, 고려시대사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무신정권 시대에 고려는 몽골의 침입으로 시련을 겪었다.

(7) 몽골 침입과 고려사회의 대응
고려가 몽골과 접촉을 가진 것은 1219년 강동성에 웅거한 거란족을 몽골과 함께 공략해 함락시킨 것에서 비롯되었다. 1225년 압록강 강가에서 귀국하던 몽골 사신 저고여가 도둑에게 피살된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트집 잡아 침입하였다.

(8) 고려 말의 권문세족과 신흥 사대부
고려 후기의 권문세족은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 광대한 농장을 경영하는 지배층으로 보수적인 사회세력이었다. 이들은 새로운 개혁에 반대하면서 고려 전기의 가문 위주 문벌귀족보다 관료적 성향이 짙은 권문세족으로 발전했다.

고려 후기에는 권문세족으로 도전하는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신흥 사대부들이 대두하였다. 이들은 개혁 정치를 주장하여 보수적인 권문세족과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신흥 사대부는 최 씨 정권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학문적 교양이 높고 행정실무에 밝은 문인들을 등용하면서부터 고려 정계에 출현하였다. 신흥 사대부는 고려 후기의 사회적 · 경제적 변동을 겪으면서 중소 지주로 성장한 권문세족에 비해 가문이 미미한 지방의 향리층 출신이다. 이들은 무신정권의 붕괴 이후 문학적 교양을 쌓은 뒤 과거를 통해 중앙정계에 진출해 커다란 사회세력으로 대두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