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

한국사(삼국시대)

토리여사 일상 2025. 2. 12. 13:25

고대

한국의 고대는 대략 기원전 1세기부터 900년까지의 시기로, 원삼국시대의 크고 작은 국가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로 합쳐진 삼국시대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시기까지를 고대라 말한다.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연맹은 각자 고유의 건국 신화를 가지고 있으며 그 시작을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주변의 소국을 흡수하여 강대해졌다.

 

이들 나라는 이렇듯 고조선 사회의 외곽에서 시간적 선후를 지니며 각자 독자적으로 성립했고, 4세기 중반 이후 서로 국경을 접하게 되기 전까지 상당한 기간 서로 별다른 교섭 없이 발전해 나갔다. 삼국시대는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세 나라가 정립하였던 한국사의 한 시기이다. 남북국시대, 후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처럼 한국사 속의 주요 국가를 중심으로 한 시대 구분 용어이다. 삼국이 고대국가 체제를 완비해 간 4세기 이후부터 신라의 삼국통일까지를 의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삼국시대의 정치>

삼국 시대 초기 국가들의 정치는 국왕과 지방 세력인 각 부의 연맹 왕국 형태였다. 고구려에는 5부가 있었으며, 백제 역시 고구려-부여계의 이주집단이 부를 형성하였고, 신라에는 6부가 있었다. 이들 부는 독자적인 무력 행위나 외교를 할 수는 없었으나 자기 영지 내에서는 독자적인 자치를 누렸다.

삼국 시대는 기원전 57년부터 668년까지 이어진 역사적 시기로, 한반도의 세 개의 왕국이 서로 간의 권력을 다투며 군사적 대결을 벌였습니다 삼국 시대는 당시 한반도의 주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변화를 반영하고 있으며, 이는 현재의 한반도 문화와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삼국 시대의 정치는 각 왕국이 각자의 왕실과 귀족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왕실은 왕을 중심으로 정치적 지배력을 행사하며, 귀족층은 신분제도를 토대로 권력과 부를 축적하였다. 귀족층과 왕실 간의 갈등과 협력이 삼국 시대의 정치적 모습을 결정했다고 볼수 있다. 삼국 시대에는 외세인 중국과의 관계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중국과의 외교적 교류와 문화적 교류가 삼국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삼국 시대의 정치적 상황은 각 왕국 간의 군사적 대결로 이어졌는데,

 

고구려, 백제, 신라는 서로의 영토를 놓고 전쟁을 벌였고, 그 결과 국경이 자주 변화하였으며 각자의 영토를 넓히거나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와의 군사적 충돌을 통해 권력을 확장하려고 했으며, 이러한 군사적 대결은 삼국 시대의 역사에 큰 특징으로 남았습니다.


이와 같이 삼국 시대는 한반도의 역사와 정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기이며, 각 왕국 간의 군사적 대결과 정치적 갈등이 한반도의 역사적 전개를 결정했다. 삼국 시대는 한반도의 문화와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며, 현재의 한반도 문화와 정치체제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러한 삼국 시대의 역사를 통해 한반도의 다양한 역사적 변천을 이해하고, 현재와의 연관성을 파악할 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3세기 전반까지도 소노부가 자체의 종묘와 사직, 즉 조상신과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등 상당한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시간의 지남에 따라 왕권이 점차 강해져 관등제가 확충되고 기존의 집단별 상하관계를 일원적인 군신의 관계로 변화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왕권 확립의 결과 각 나라에서는 율령이 반포되고 호구를 조사하여 세입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귀족의 권위는 여전히 막강하였으며 실제 국정의 운영은 이들 귀족과 왕의 회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고구려의 대대로, 백제의 정사암 고사, 신라의 화백제도 등은 삼국시대 후기까지도 귀족의 권력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백제

백제(百濟)는 기원전 18년 온조에 의해 하남 위례성에 건국되었다.

4세기 근초고왕 때는 황해도 일부 지역에 진출하고 전라도 지역의 마한 잔존 세력을 병합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후 고구려의 연이은 압박으로 한강 유역을 빼앗기는 수난을 맞았다.

침체에 빠진 백제는 무령왕 때부터 중흥을 시작하여 성왕의 치세에 이르러 부여를 계승해 국호를 남부여(南扶余)라하고 수도를 웅진(熊津 :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사비성(泗沘城 : 충청남도 부여군)으로 천도하는 등 나라를 부흥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협공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았으나 신라의 배신으로 모두 허사가 되고 결국 본인도 관산성에서 전사했다.

그 후 백제의 무왕과 의자왕은 부흥을 위해 노력했으나, 의자왕의 잦은 실정으로 국력이 소모되었다. 결국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였다.


신라

신라(新羅)는 경주 지역에서 기원전 57년경에 건국되었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먼저 세워졌지만 틀을 세우는 데는 가장 늦었다.

초기에는 박, 석, 김의 세 가문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군주)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4세기 내물 이사금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기 위해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김 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다.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군주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대외적으로는 우산국을 복속시키기도 하였다.

이어 법흥왕은 병부 설치, 율령 반포, 공복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골품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들을 포섭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다.

진흥왕 때에 이르러 내부 결속을 다지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였다. 진흥왕은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으며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다.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고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서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7세기경 나·당 연합을 결성하여 660년 백제를,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또한 당나라군을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여 삼국통일을 달성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