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

조선시대-붕당정치

토리여사 일상 2025. 2. 19. 09:28

조선에서 붕당정치란?

조선(朝鮮)은 한반도에 있던 옛 국가이다. 1392년 이성계가 건국하여 1897년 고종의 칭제건원으로 대한제국이 세워질 때까지 존속하였다. 수도는 지금의 서울특별시인 한양이었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만주 및 연해주와 국경이 있었다.

조선의 정치는 유교의 한 갈래인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삼아 사대부를 근간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로서 운용되었다.

성리학이란?
성리학은 중국 송나라 때부터 시작된 유학의 한 갈래이다. 경전의 뜻을 다시 해석하거나 국왕에 대한 충성심만을 강조하던 기존 유학의 학풍과는 달리 성리학은 인간과 우주에 대해 깊이 연구하는 학문이었다. "우주 만물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인간은 본래 선하고 착한가, 아니면 악한가?"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연구했다.

성리학에서는 자연, 사람, 사회의 원리를 '이(理)'와 '기(氣)'로 설명하는데, 모든 것은 '기(氣)'의 움직임에 따라 태어나고 죽는다고 말한다. 이런 '기(氣)'의 근본을 이루는 것이 바로 '이(理)'이다. 사람은 '이(理)'를 따라 살면 도덕적이고 선하게 살고 '기(氣)'를 따라 살면 본능에만 충실한 악한 생활을 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어렵게 들리지만 지키고 바르게 살기 위해 노력하라는 뜻이다.

조선의 국왕은 이론적으로 전제군주의 지위를 지녔으며 스스로를 절제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양반 관료와 타협하여 정치를 운영하였다. 양반 관료는 초기에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뉘어 갈등을 보였으나 중기 이후 사림파가 득세하였고 이후 여러 정파로 나뉘어 경쟁하는 붕당 정치를 형성하였다.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 despotic monarchy)는 정부 형태의 하나로서, 독재적인 통치자가 법률과 반대파의 의견과 무관하게 나라와 국민을 제약 없이 통치하는 체제이다.

전제군주제 국가는 태어날 때부터 많은 통치 교육과 훈련을 받은 군주에 전적으로 의지한다.

이론적으로 전제 군주는 부르주아, 기술자와 귀족 계급, 때때로 성직자까지 포함해서 거느리는 절대적인 권력을 갖지만, 현실적으로는 군주가 일부 제한된 권력을 누리도록 제한되곤 한다.

조선 중기에서 후기에 걸쳐 사색당파로 굳어지던 붕당 정치는 성리학의 학풍과도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어 예송논쟁이나 호락논쟁과 같은 주제가 정치의 첨예한 쟁점으로 부각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붕당 정치는 조선 중기의 정치 운영 형태로 근래까지 통상적으로 이 정치 형태는 사화(士禍) 당쟁(黨爭)을 중심으로 망국적인 정치 현상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부정적 인식의 대략은 아래와 같다.

조선시대의 왕정은 당초 중앙집권 관료제로 운영되었으나 15세기 말엽부터 훈구파로 불리는 기성 관료 집단을 비판하는 사림파(士林派)가 대두했다. 이후 양자의 충돌로 여러 차례 사화가 반복되었고 마지막에는 정치적 이해 관계를 같이하는 무리로서 붕당이 발생해 항구적인 당쟁이 시작되었다.

조정의 인사들이 서인(西人)과 동인(東人)으로 나뉘고 나아가 재야의 유생들까지도 어느 한쪽을 지지해 모든 관료와 지식인들이 대를 물려가면서 대립하는 양상을 빚었다.

동서분당 이후 붕당은 계속 핵분열을 일으키며 더 세분되게 나뉘어져 갔다. 동인에서 남인(南人)·북인(北人)으로 나뉘고 서인(西人)에서 노론(老論)·소론(少論) 등을 흔히 사색(四色)이라고 하여 중심적인 붕당으로 꼽았다.

붕당 간의 대립은 지극히 배타적이었다. 민생과는 관련 없는 문제들을 중심으로 대립이 이어가면서 국력을 약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알려진다.

치열한 붕당 간의 대립은 영조, 정조 등의 탕평 정책으로 다소 누그러졌지만 19세기에는 세도정치로 발전해 망국의 길을 초래하게 되었다.

붕당정치는 사족 양반이라는 특정한 신분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시대적 한계성을 가지지만, 교육 기회를 누린 중소지주층의 대부분을 포용한 정치 형태로서 시대적 발전성도 인정할 수 있다.

붕당정치의 저변을 이룬 재지 사림은 각 지방의 서원을 중심으로 향회(鄕會)를 구성해 해당 지역의 향권(鄕權)을 주도해 수령(守令)의 일방적 횡포를 용납하지 않는 체제를 유지했다.

17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붕당정치는 한계를 드러냈다. 즉, 붕당 간의 공존의식이 무너지면서 어느 정파이든지 간에 일당전제(一黨專制)의 성향을 강하게 발휘해 정쟁이 격렬해지는 양상을 보였다.

16∼17세기의 붕당정치는 조선시대 정치의 이러한 발전적 변천의 한가운데서 중소 지주 출신의 지식인들이 성립시킨 성리학적 이념 실현을 목표로 한 고도의 주지주의(主知主義)적인 정치 형태였다.

19세기에 이르러 세도 정치가 등장하면서 붕당 정치 체제는 쇠락하였다.

조선의 군사는 초기 오위 체계로 편성되어 있다가 이후 지역 거점을 중심으로 방어 체계를 구축한 진관제와 이를 보완하는 제승방략을 핵심으로 하였다. 

이러한 전략은 임진왜란을 거치며 급작스러운 외침에 맞서기 어렵다는 점이 부각되어 훈련도감을 시작으로 오군영의 중앙군을 두고 각도에 속오군을 두어 지방을 방어하는 형태로 변화되었고, 군사적 목적으로 설치되었던 비변사가 상설화되면서 의정부를 제치고 실질적인 정치 의결 기구로 변화하였다.

조선의 주요 운송 수단은 강과 바다를 이용한 수운이었다. 주요 교통 요지에 조창을 세워 세곡을 보관하였고 조운선을 통하여 한양까지 운반하였다. 육지의 교통로는 역참을 두어 국가의 주요 연락망으로 삼았다.

조선의 공식적 신분제는 양인과 천민만을 구분하는 양천제였으나, 실제로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 등으로 세분되어 있었다.


조선의 문화는 여러 이웃 문화의 수용과 독창적인 발전이 교차하며 형성되었다. 오늘날 한국의 대표적 전통문화로 손꼽히는 한옥, 한복, 한식 등은 대부분 조선 후기에 완성된 문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