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토리여사 일상 2025. 2. 17. 19:53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불법적으로 강점당한 지 9년이 지난 1919년, 조선인들은 3.1 운동을 통해 독립 국가임을 선포한다. 

3.1 운동은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 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만방에 알린 날을 기념하는 날로 한국의 국경일이다.

3.1 운동의 구호가 "대한독립 만세"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3.1 운동으로 시작된 독립 만세운동은 몇개월 동안 전국으로 퍼지고, 그 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만들어진다. 그 뒤로 광복이 될 때까지 독립운동이 더욱 가열하게 진행되었고, 일제의 탄압도 거세졌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1919년 임시정부를 계승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 발표를 시작으로 서울과 평양을 비롯한 전국 각지는 물론 중국의 간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미국의 한인사회에서도 독립 만세 시위와 독립선언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때의 정부 수립은 정식 정부를 수립하기 이전 단계인 ‘임시정부’였다. 

이 중 가장 먼저 임시정부 수립을 표방한 곳은 러시아 한인들을 총괄하던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였다. 전로한족중앙총회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곧바로 정부 수립에 착수하였다. 

1919년 2월 니콜 리스크(현 우수리스크)에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를 조직하여 임시정부로서 역할 할 것임을 천명하고 3월 대한국민의회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어 국내에서도 3월 초부터 임시정부 수립을 추진하여 4월 13도 대표자회와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임시정부를 선포하였다. 이른바 한성정부(漢城政府)이다. 

또한 상해에서도 1919년 초부터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상해로 건너온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프랑스조 계에 독립 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임시정부 수립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4월 10일 29명의 대표자가 모여 ‘대한민국임시의정원(大韓民國臨時議政院)’을 결성하였다. 

임시의정원은 오늘날의 입법기관인 ‘국회’에 해당한다. 임시의정원은 첫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하는 한편, 정부 조직과 내각 구성원을 선출하고, 헌법에 해당하는 ‘임시헌장’을 선포하였다. 이로써 대한제국이 멸망한 지 9년 만에 ‘제국’에서 ‘민국’으로 전환하면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선언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민주공화국임을 선언한 것이었고, 해방 이후 정식으로 ‘대한민국’이 수립된 이후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 상해의 임시의정원은 미흡한 정부 조직을 체계화하는 한편, 제4회 회의에서는 한성정부·대한국민의회 등 다른 임시정부 조직과도 통합을 의결하였다. 

1919년 통합 임시정부 수립

오늘, 여러 정부가 상하이 임시정부로 통합된다. 3·1운동 전후로 연해주에 대한국민의회,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내에 한성정부가 세워졌습니다. 정부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전개됐고 이에 한성정부를 계승하고 대한국민의회를 흡수하는 형식으로 통합 정부인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다. 임시정부는 삼권 분립에 기초한 민주공화제 정부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이끄는 구심점이 되었지요.

임시정부 통합 노력은 1919년 5월 내무 총장으로 임명된 안창호(安昌浩)가 미국에서 상해로 오면서 급진전하였다. 

안창호의 역할로 상해 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를 동시에 해산하고 13도 대표가 조직한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여 새롭게 의회를 구성하자는 통합안이 통과되었다. 다만 정부의 위치는 당분간 상해에 둘 것을 결정하였다.

통합 임시정부가 출발부터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대한국민의회를 이끌었던 문창범(文昌範)은 상해 임시정부 조직이 한성정부 개조 수준에 그치자 이에 반발하여 내각 취임을 거부하였고, 신채호(申采浩)를 비롯한 무장투쟁 세력은 이승만(李承晩)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그의 위임통치(委任統治)를 비판하면서 북경으로 돌아가 버렸다. 결국 안창호의 설득으로 11월 러시아의 이동휘(李東輝)가 국무총리로 취임하면서 불완전하나마 통합 정부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7부 1국 체제로 조직된 임시정부는 통일·군사·외교·교육·사법·재정 등 다양한 방략을 동시에 추진하였다. 그중 가장 먼저 추진한 것은 안창호의 주도로 실시된 연통제(聯通制)와 교통국(交通局)의 설치였다. 이를 통해 국내의 행정을 장악하고 교통망을 확보하여 임시정부의 통신 연락과 주요 거점으로 활용하였다. 이 연통제와 교통국은 선전 활동과 군자금 모집,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거점 조직 확보와 함께 임시정부는 1919년 12월부터 군사 활동 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하였다. 이는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대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한 가장 큰 재정기지는 재미 한인사회였고, 재미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기구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였다. 

1919년 말부터 임시정부의 재정을 담당하던 연통제와 교통국이 일제에 의해 발각되기 위해 시작하였고,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에서 승리한 이후 만주 지역 독립군 조직이 러시아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면서 임시정부의 활동은 1920년 말부터 점차 쇠퇴하기 위해 시작하였다.

 

임시정부(臨時政府) 또는 과도정부(過渡政府, interim government)는 정부가 무너진 후, 무정부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임시로 구성된 정부를 말한다. 다른 나라의 침략 등으로 해외에 세워진 망명정부를 '임시정부'라고 칭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