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조선시대 (1)
한국사-조선시대
조선시대는 근대에 해당한다. 조선시대는 전기·후기가 아닌 초기·전기·중기·후기로 나뉘기도 한다.
대략 조선이 건국된 1392년부터 대한제국이 멸망된 1910년까지를 조선시대라고 하는데 다만, 태조 이성계가 왕으로 즉위하여 조선을 건국한 1392년부터 1393년 3월 27일까지는 조금 전 왕조의 국명인 고려를 국호로 유지했었다.
그리고 1897년에 성립된 대한제국도 왕조 자체는 조선 왕조를 그대로 이어가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조선의 연장선상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아주 엄밀하게 말하면 조선시대는 '조선'이라는 국호가 쓰인 1393년부터 1897년까지이나, 일반적으로 한국 사회에서는 이성계가 공양왕을 폐위하고서 본인이 왕위에 올라 전주 이씨 왕조가 성립된 1392년부터 일본 제국에게 강제 병합되어 전주 이씨 왕조가 멸망한 1910년까지가 조선시대로 여겨진다.
1. 초기
1388년 고려의 무신으로서 우군 도통사를 맡았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위화도회군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우왕·창왕·공양왕 등을 왕위에 올렸다가 폐위시키는 등 정권·군권을 장악하고, 혁명파 신진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이 되는 과전법을 단행하여 경제적인 실권까지 장악하였다.
이어 정몽주가 제거되자 1392년 음력 7월 이성계는 공양왕의 왕위를 물려받아 새 왕조를 개국하여 태조가 되었다.
1393년에는 국명을 조선(朝鮮)으로 고치고 1394년에는 한양으로 천도하여 여러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어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이 발생하였고,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에서 승리하여 왕위에 오른 태종은 정당성이 결여된 집권으로 쇠약해진 왕권을 다시 강화해 나가고 임금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육조직계제와 관제 개정 등 관료 제도를 정비하기도 하였다.
특히 사병을 혁파하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이들을 양민으로 복귀시키는 등 국가재정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부왕 태조가 신덕왕후 강 씨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세운 것을 불쾌히 여긴 그는 서자(庶子) 및 서얼(庶孼)들의 관직 임용 제한 규정을 만든다.
이때 구성된 서얼 금고형과 적서 차별 제도는 성종 때 세부 조항을 성종이 직접 지어 반포함으로써, 재가며(재혼 여성) 자손 금고형과 함께 하나의 규정으로 정착되어 영조 때까지 서얼의 관직 임용을 규제하는 수단으로 작용하여 많은 서얼의 자유로운 활동의 제한 및 사회적 차별을 유발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고려의 유신(遺臣)을 자처하며 새 조정에 협력을 거부하는 인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태종 중반 이후 서서히 고려 유신 세대는 사라졌고, 그 아들, 손자 세대는 새 조정에 출사하게 되었다.
2. 전기
조선시대의 과학과 기술은 조선 전기와 후기가 그 발전 양상에 차이가 있다. 조선시대의 전기와 후기는 임진왜란을 경계로 나누어지는데, 전기에는 주로 활자, 의학, 천문학, 무기 제조 기술 등 실생활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과학 기술이 발전하였고, 후기에는 서양 문물의 전래로 인하여 그들의 문화를 연구하는 활동이 두드러졌다.
초기를 지나 왕으로 등극한 세종은 학문·군사·과학·문화 등 모든 면에서 큰 업적을 이룩하였고 정치는 안정되어 갔다.
국방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북방 지역인 4군 6진을 개척하여 국경선을 확정했으며, 화포 제작 및 조선 기술 발전 등을 통해 왜구의 약탈을 방지하였다. 궁중 안에 정책 연구 기관인 집현전을 설치하여 학문을 진흥했다. 또한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와 금속활자를 개량하였으며 아악을 정리하였다.
세종은 조선의 제4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418~1450년이며, 1418년 6월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했다. 세종대는 우리 민족사상 가장 빛나는 시기이다.
집현전을 통해 많은 인재가 양성되었고, 유교 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제도가 정비되었으며,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 사업이 이루어졌다. 또 농업과 과학기술의 발전, 의약 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수많은 사업을 통해 민족국가의 기틀이 공고해졌다. 훈민정음 창제는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능 호는 영릉으로 여주시에 있다.
이 시대는 또 음악에 있어 우리 역사상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긴 시기였는데, 세종의 지휘와 참여로서 이루어졌다.
유교 정치에 있어서 중요시되는 것이 유교적 의례인데, 국가의 의례인 오례에는 그에 합당한 음악이 따르게 마련이다. 따라서, 유교적인 의례의 정리와 함께 음악의 정리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세종의 음악적 업적은 크게 아악(雅樂)의 부흥, 악기(樂器)의 제작, 향악(鄕樂)의 창작, 정간보(井間譜)의 창안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업적은 음악에 대한 깊은 관심과 조예를 가진 세종이 박연(朴堧)과 같은 음악의 전문가를 만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었다.
조선시대 악법 중 최악의 악법인 노비종모법도 세종이 만들었다
세조는 태종처럼 신하의 권력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호패법을 다시 복원하고,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을 만들기도 하였다. 성종은 개국 이후의 문물제도를 정비하였다.
또한 세종 때부터 이어온 법전 편찬 사업이었던 《경국대전》의 편찬을 완성하고 국가의 의례서인《국조오례의》를 편찬하였다. 또한 온건파 신진사대부의 후예들인 영남의 사림파를 등용하여, 공신 세력인 훈구파를 견제하였다. 이로써 조선 왕조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15세기 말부터 지방의 사림 세력이 정계에서 세력을 키우기 위해 시작했다. 연산군의 거듭된 실정에 견디지 못해 사림파를 중심으로 일어난 중종반정을 통해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한 사림파는 명종 때 비소 훈구파를 몰아내고 조정의 실권을 잡았다. 이때부터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